한국 경제사를 따라오다 보면 조금 이상한 지점에 도착한다.
1997년 외환위기를 겪었지만 한국 경제는 빠르게 회복했다.
IT 산업이 성장했고, 수출도 크게 늘었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도 등장했다.
그런데 여기서 새로운 질문이 생긴다.
경제가 성장했다면 왜 모든 사람이 그 성장을 똑같이 느끼지는 못했을까?
GDP가 증가하고 수출이 늘어나는 것과
한 가구의 소득이 늘어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2000년대 한국 경제를 이해하려면 바로 이 차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경제 전체가 성장하는 것과 개인의 소득이 증가하는 것은 다르다
GDP는 한 나라에서 일정 기간 동안 만들어진 부가가치를 보여준다.
수출이 크게 늘고 기업의 생산이 증가하면 GDP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
하지만 GDP가 5% 증가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의 월급이 5% 올랐다.”
는 뜻은 아니다.
경제성장의 결과가 누구에게 얼마나 돌아가는지는 별도의 문제다.
특히 한국처럼 수출 제조업의 비중이 높은 경제에서는 이 차이가 중요하다.
반도체를 많이 수출해서 수출액이 크게 증가했다고 생각해보자.
반도체 기업의 생산과 이익은 크게 늘어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국민이 반도체 회사에서 일하는 것은 아니다.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사람,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사람의 소득이 같은 속도로 증가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이 시기부터 한국 경제를 볼 때는
“얼마나 성장했는가?”
뿐만 아니라
“어디에서 성장했는가?”
를 함께 봐야 한다.
2. 외환위기는 노동시장도 바꾸었다
1997년 외환위기는 기업과 금융기관만 바꾼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일하는 방식도 변화시켰다.
외환위기 이후 기업들은 비용을 줄이고 효율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구조조정을 진행했다.
고용 역시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KDI의 연구에 따르면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소득불평등은 위기 이전보다 높아졌다. 1995~1997년 도시 임금근로자 가구의 지니계수는 0.284~0.291 수준이었지만 1998~2000년에는 0.316~0.320 수준으로 상승했다.
물론 이것을 단순히
“외환위기 때문에 모든 불평등이 발생했다.”
고 설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외환위기가 기존의 노동시장 구조를 크게 흔들었고, 이후 고용과 소득의 격차가 중요한 경제 문제가 되었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다.
3. 같은 경제에서 일해도 임금은 달랐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기업 규모의 차이다.
한국 경제가 산업화되는 과정에서 대기업은 생산과 수출을 확대했다.
그리고 1990년대와 2000년대를 거치면서 대기업은 더욱 높은 부가가치를 만들어내는 분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반면 많은 중소기업은 대기업의 협력업체나 하청업체로 연결되었다.
이 구조에서는 같은 제조업 안에서도 기업 규모에 따라 생산성과 임금에 차이가 생길 수 있다.
KDI의 연구를 보면 500인 이상 사업체의 임금을 100으로 놓았을 때 10~29인 사업체의 상대적 임금 수준은 1980년 93에서 1990년 74, 2000년 68, 2003년 59까지 낮아졌다. 연구에서는 이러한 격차와 하청 의존도의 관계도 분석했다.
즉 한국 경제의 성장 과정에서
대기업이 성장했다
는 사실과
모든 기업의 근로조건이 같은 속도로 좋아졌다
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4. 그렇다면 대기업만 돈을 벌었을까?
그렇게 단순하게 볼 수도 없다.
대기업의 성장은 수많은 협력업체와 서비스업, 물류업, 금융업 등에 영향을 미친다.
수출이 늘어나면 생산이 늘어나고, 생산이 늘어나면 부품과 원자재의 수요도 증가한다.
따라서 대기업의 성장이 다른 기업으로 연결되는 효과도 존재한다.
문제는 그 연결의 정도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동차 수출이 증가한다고 해보자.
자동차 제조사의 생산이 늘어난다.
그 과정에서 부품업체, 운송업체, 항만, 금융회사 등도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각각이 얻는 부가가치와 임금은 다르다.
그래서 경제성장을 볼 때는 단순히
“수출이 늘었다.”
라고 보는 것보다
“수출 증가가 국내의 어떤 기업과 어떤 노동자에게 연결되었는가?”
를 봐야 한다.
5. 2000년대에는 ‘좋은 일자리’의 의미도 달라졌다
산업화 초기 한국의 좋은 일자리는 비교적 단순했다.
대기업 제조업에 들어가면 높은 임금과 안정적인 고용을 기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산업구조가 바뀌면서 기업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자동화와 외주화를 확대했다.
대기업 내부에는 상대적으로 고부가가치 업무가 남고, 생산 과정의 일부가 다른 기업으로 이동하는 현상도 나타났다.
KDI의 연구는 이러한 장기적인 변화가 기업 규모별 임금 격차와 연결되었다고 분석한다. 또한 1980~2016년 한국의 임금불평등을 분석한 연구에서는 1995~2007년에 임금불평등이 증가했으며, 이후에는 사업체 규모가 임금 격차를 설명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고 분석한다.
이렇게 되면 문제가 하나 생긴다.
경제가 고도화될수록 오히려 좋은 일자리는 상대적으로 적어질 수 있다.
이것이 이후 한국 사회에서 대기업 취업 경쟁이 매우 치열해지는 배경 가운데 하나다.
6. 비정규직이라는 새로운 문제가 등장했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노동시장에서 중요한 단어가 하나 등장한다.
바로 비정규직이다.
기업 입장에서는 경기 변화에 대응하고 인건비를 관리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고용을 활용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노동자 입장에서는 고용 안정성과 임금, 복지에서 차이가 발생할 수 있었다.
2007년에는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등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었고, 2009년부터 5인 이상 사업장으로 적용 범위가 확대되었다.
KDI 역시 2009년 비정규직에 관한 종합 연구를 진행하면서 이 문제를 고용과 근로조건의 중요한 구조적 문제로 다루었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도
“비정규직이 나쁘다.”
라고 단순하게 결론내리는 것이 아니다.
기업에게는 고용의 유연성이 필요할 수 있고, 노동자에게는 안정적인 고용이 필요하다.
문제는 경제가 이 두 가지 요구를 어떻게 조정하느냐이다.
7. 특히 저소득층은 성장의 혜택을 다르게 경험했다
경제성장이 모든 소득계층에 같은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니다.
KDI 연구에 따르면 1995~2005년 도시지역 하위 20% 가구의 실질소득은 거의 개선되지 않았던 반면, 전체 근로자 가구는 연평균 1.7%의 소득 증가를 기록했다.
1995년 이후 2008년까지 근로소득과 사업소득을 합친 실질소득은 중위계층에서 18% 증가했지만 하위 20%에서는 오히려 1% 감소한 것으로 분석됐다. 연구는 그 배경 가운데 하나로 저소득층이 주로 종사하는 소규모 사업체의 성장 부진을 지적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차이다.
경제가 성장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성장했다.
하지만 성장의 속도와 방향이 계층별로 달랐다.
8. 그래서 ‘수출’과 ‘내수’의 차이가 중요해졌다
한국 경제는 산업화 이후 계속 수출의 중요성이 커졌다.
2000년대에는 중국이 세계의 생산기지로 성장하면서 한국 기업의 수출도 빠르게 증가했다.
반도체, 자동차, 선박, 전자제품 같은 산업은 세계시장을 대상으로 성장했다.
그런데 모든 국내 산업이 세계시장에서 같은 경쟁력을 갖는 것은 아니다.
수출 제조업은 세계 수요가 증가하면 빠르게 성장할 수 있지만,
동네 식당이나 작은 가게, 일부 생활서비스업은 세계시장의 성장과 직접 연결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수출기업의 성장
과
국내 서비스업의 체감경기
사이에 차이가 생길 수 있다.
이것이 2000년대 한국 경제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다.
9.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차이는 산업구조의 문제이기도 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격차를 단순히
“대기업이 돈을 많이 벌어서”
라고 설명하면 부족하다.
한국 산업구조 자체가 그렇게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대기업은 자본과 기술을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세계시장에서 경쟁했다.
중소기업 상당수는 대기업의 생산망에 연결되어 있었다.
이 과정에서 대기업은 규모의 경제와 기술투자를 통해 생산성을 높일 수 있었지만, 모든 중소기업이 같은 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결과적으로 한국 경제에는 두 가지 모습이 동시에 나타났다.
세계시장에서 경쟁하는 고생산성 기업
과
국내시장에 의존하는 상대적으로 생산성이 낮은 기업
이다.
이 격차는 시간이 지나면서 임금 격차로도 연결됐다.
10. 그렇다면 한국의 성장모델이 실패한 것일까?
여기서는 조심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수출주도 성장모델은 분명 엄청난 경제성장을 만들어냈다.
한국은 세계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 제조기업을 만들었고, 반도체·자동차·조선·전자 등 여러 산업에서 국제적인 경쟁력을 확보했다.
문제는 성장모델이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의 이분법이 아니다.
성공한 성장모델도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낼 수 있다.
1960~1980년대에는
“어떻게 생산을 늘릴 것인가?”
가 중요한 질문이었다.
1990년대에는
“어떻게 세계시장에서 경쟁할 것인가?”
가 중요해졌다.
그리고 2000년대에는 새로운 질문이 등장한다.
“성장한 경제의 성과를 어떻게 국내의 소득과 일자리로 연결할 것인가?”
경제가 커졌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질문이 중요해진 것이다.
11. 한국 경제를 보는 기준이 바뀌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경제사를 공부하면서 우리는 주로 이런 숫자를 봤다.
GDP
수출액
산업생산
1인당 국민소득
외환보유액
그런데 이제는 여기에 다른 숫자들이 필요해진다.
가계소득
중위소득
임금
고용률
비정규직 비중
기업 규모별 임금
가계부채
주거비
왜일까?
국가경제의 규모와 개인의 경제적 삶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GDP가 얼마나 증가했는지는 경제 전체의 크기를 보여준다.
하지만 사람들이 실제로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알려면 다른 지표도 함께 봐야 한다.
이것이 2000년대 이후 경제사를 볼 때 중요한 변화다.
12. 그리고 새로운 문제가 하나 더 생겼다
여기까지 오면 또 하나의 이상한 현상이 보인다.
한국 경제는 계속 성장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경제성장을 체감하는 방식은 점점 달라졌다.
대기업의 수출은 증가했다.
하지만 중소기업과 자영업자의 상황은 같지 않았다.
고학력 노동자의 기회는 확대되었다.
하지만 좋은 일자리를 둘러싼 경쟁도 강해졌다.
평균적인 소득은 증가했다.
하지만 저소득층의 소득은 같은 속도로 증가하지 않았다.
그리고 여기에 또 하나가 등장한다.
집값과 가계부채다.
소득만으로 생활수준을 설명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집값이 상승하면 자산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경제적 위치가 달라진다.
대출을 통해 집을 구입한 사람은 자산가격과 금리의 영향을 동시에 받는다.
결국 2000년대 한국 경제를 이해하려면 노동시장뿐 아니라 자산시장도 함께 봐야 한다.
다음 질문
지금까지 한국 경제사를 따라오면서 우리는 계속 성장의 이야기를 했다.
농업생산을 늘렸고,
시장을 확대했고,
공장을 만들었고,
수출을 늘렸고,
중화학공업에 투자했고,
IT 산업을 키웠고,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과 연결됐다.
그 결과 한국 경제의 규모는 크게 커졌다.
그런데 경제가 성장할수록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더 많이 생산하는 것”만으로 사람들의 삶이 좋아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제 경제성장의 또 다른 결과를 살펴봐야 한다.
집값, 부채, 자산.
한국 사람들은 왜 점점 더 많은 돈을 집에 묶어두게 되었을까?
그리고 왜 한국 경제에서 부동산과 가계부채가 이렇게 중요한 문제가 되었을까?
다음 글에서는 이 질문을 따라가 보자.
한국 사람들은 왜 집에 많은 돈을 쓰게 되었을까? — 부동산과 가계부채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