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외환위기는 한국 경제를 크게 흔들었다.
기업이 무너졌고,
금융기관이 정리됐으며,
실업자가 크게 늘었다.
그런데 불과 몇 년 뒤 한국 경제에서는 새로운 산업이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한다.
인터넷,
휴대전화,
반도체,
벤처기업,
초고속 통신.
199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 경제를 대표하던 산업은 철강, 자동차, 조선, 석유화학 같은 제조업이었다.
그런데 2000년대가 시작되면서 한국 경제를 설명하는 새로운 단어가 등장한다.
IT 산업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떻게 IT 강국이 되었을까?
1. 외환위기가 IT 산업을 만든 것일까?
먼저 오해하기 쉬운 부분부터 살펴보자.
1997년 외환위기가 발생했다고 해서 한국이 갑자기 IT 국가가 된 것은 아니다.
IT 산업의 기반은 이미 만들어지고 있었다.
1980년대부터 전자산업과 반도체 산업이 성장했고,
1990년대에는 이동통신과 컴퓨터 보급이 확대됐다.
1996년에는 코스닥 시장이 만들어졌고,
1997년에는 벤처기업 육성을 위한 특별법도 제정됐다.
즉,
기술과 제도적 기반은 외환위기 이전부터 조금씩 만들어지고 있었다.
외환위기는 이 흐름을 완전히 새로 만든 것이 아니라,
기존에 존재하던 산업과 새로운 정책이 빠르게 결합하는 계기
가 되었다.
2. 외환위기 이후 기업이 달라졌다
외환위기 이전의 한국 경제에서는 대기업의 역할이 매우 컸다.
대규모 자본을 투입하고,
공장을 만들고,
생산량을 늘리고,
수출을 확대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기업들은 이전처럼 빚을 늘려 몸집을 키우는 방식만으로 성장하기 어려워졌다.
기업의 재무건전성이 중요해졌고,
투자의 효율성도 중요해졌다.
그러면서 새로운 질문이 등장한다.
“큰 공장을 만드는 것 말고, 새로운 기술과 아이디어로 성장할 수는 없을까?”
여기에서 벤처기업이 주목받기 시작한다.
3. 벤처기업이 등장하기 좋은 환경이 만들어졌다
벤처기업이라는 개념 자체는 외환위기 이후 처음 등장한 것이 아니다.
한국에서는 1980년대부터 벤처캐피털 제도가 만들어졌고, 1996년에는 코스닥 시장이 도입됐다.
하지만 당시에는 벤처기업이 성장하기 위한 시장이 충분히 크지 않았다.
그런데 1990년대 후반 상황이 달라졌다.
세계적으로 인터넷 산업이 빠르게 성장했고,
인터넷을 이용한 새로운 사업이 등장했다.
한국에서도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 과정에서 새로운 창업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정부도 벤처산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KDI는 한국 벤처산업의 본격적인 성장이 인터넷의 급속한 확산, 세계적인 벤처 붐, 외환위기 이후의 창업 유인 증가, 코스닥 시장의 성장이 서로 결합하면서 가능해졌다고 설명한다.
즉,
외환위기 → 구조조정 → 새로운 일자리와 사업을 찾는 사람 증가
와
인터넷 확산 → 새로운 시장 등장
이 동시에 일어난 것이다.
4. 그리고 결정적인 변화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초고속 인터넷이다.
인터넷이 있다고 해서 모두가 인터넷 경제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터넷을 빠르고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은 이 부분에서 매우 빠르게 움직였다.
2001년 초 한국의 초고속 인터넷 가입률은 인구 100명당 10명을 넘어섰다.
당시 OECD 국가 가운데 압도적으로 높은 수준이었다.
2001년 상반기에만 DSL 가입자가 약 140만 명, 케이블 인터넷 가입자가 약 75만 명 증가했다.
OECD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고정 초고속인터넷 가입률은 2001년 이미 인구 100명당 20건을 넘는 수준에 도달했다. 당시 다른 OECD 국가보다 매우 빠른 확산이었다.
이것은 단순히 인터넷을 빨리 설치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인터넷을 사용하는 사람이 매우 빠르게 늘어났다는 뜻이다.
5. 사용자가 많아지면 시장도 달라진다
생각해보자.
인터넷 사용자가 100명뿐이라면 인터넷으로 사업하기 어렵다.
하지만 수백만 명이 사용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정보를 찾는다.
물건을 사고,
게임을 하고,
채팅을 하고,
음악을 듣고,
뉴스를 읽는다.
기업 입장에서는 새로운 시장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인터넷 기업이 등장할 수 있었다.
포털,
온라인 게임,
전자상거래,
검색,
광고,
온라인 커뮤니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산업들이 생겨났다.
한국의 인터넷 보급 속도가 빨랐기 때문에 이러한 서비스가 성장할 수 있는 국내 시장도 빠르게 만들어졌다.
6. PC방은 단순한 오락공간이 아니었다
이 시기의 한국 사회를 이해하려면 PC방도 빼놓기 어렵다.
인터넷을 이용하려면 컴퓨터가 필요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모든 가정에 고성능 컴퓨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PC방은 사람들이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인터넷과 게임을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특히 온라인 게임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PC방은 새로운 인터넷 문화를 만들어냈다.
사람들은 인터넷을 혼자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온라인에서 다른 사람과 연결되는 방식
을 익히기 시작했다.
인터넷은 단순한 정보검색 도구에서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플랫폼
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이후 모바일 인터넷과 SNS의 등장에도 중요한 기반이 된다.
7. 그런데 IT 산업이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서 중요한 반전이 나온다.
1999년부터 2000년까지 벤처와 IT 기업에 대한 기대가 매우 커졌다.
인터넷 기업의 주가가 빠르게 상승했고,
코스닥 시장도 크게 성장했다.
사람들은 인터넷이 새로운 경제를 만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새로운 산업은 만들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산업의 성장과 기업의 주가 상승은 같은 것이 아니다.
인터넷 사용자가 늘어난다고 해서 모든 인터넷 기업이 돈을 버는 것은 아니다.
사용자는 많은데 수익모델이 없을 수도 있다.
기업의 기술은 뛰어나지만 현금흐름이 부족할 수도 있다.
그런데도 미래의 성장 가능성만으로 기업가치가 계속 올라갈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거품이 만들어진다.
8. 2000년, IT 버블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2000년부터 세계적으로 기술주에 대한 기대가 꺾이기 시작했다.
한국의 코스닥 시장도 큰 충격을 받았다.
벤처기업의 주가가 급락했고,
투자자들의 기대도 빠르게 식었다.
이후 일부 기업은 사라졌고,
벤처산업도 조정을 겪었다.
KDI는 1999~2000년 형성된 벤처버블이 붕괴하면서 IT 부문 내부에서도 기업 간 성과 차이가 커졌다고 분석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긴다.
“그렇다면 한국의 IT 산업도 실패한 것 아닐까?”
그렇지는 않았다.
9. 주식시장의 거품과 산업의 성장은 서로 다른 문제다
이 부분이 중요하다.
기업의 주가가 폭락했다고 해서 그 산업의 기술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인터넷 기업의 주가가 떨어졌다고 해서
인터넷 사용자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초고속 인터넷망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컴퓨터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온라인 게임을 이용하는 사람도 사라지지 않는다.
즉,
금융시장의 거품은 꺼졌지만 인터넷이라는 기술과 시장 자체는 계속 성장할 수 있었다.
실제로 한국의 초고속 인터넷 보급은 2000년대에도 계속 확대됐다.
이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버블의 붕괴와 산업의 붕괴는 같은 것이 아니다.
10. 오히려 IT 산업의 중심이 조금씩 달라졌다
초기 인터넷 붐에서는 수많은 벤처기업이 주목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시장은 점점 냉정해졌다.
돈을 벌지 못하는 기업은 살아남기 어려워졌다.
반대로 기술과 자본을 갖춘 기업은 살아남았다.
특히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같은 제조업 기반의 IT 산업은 계속 성장했다.
KDI의 분석을 보면 전자·전기 산업이 제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90년 14.3%에서 2000년 18.5%로 상승했다. 특히 반도체 산업은 1990년 이후 빠르게 성장했다.
한국의 IT 산업은 결국
인터넷 벤처기업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반도체,
휴대전화,
디스플레이,
전자제품,
통신서비스,
인터넷 서비스가 서로 연결된 하나의 산업 생태계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11. 반도체가 특히 중요했다
여기에서 1980년대부터 투자해온 반도체 산업의 의미가 다시 나타난다.
반도체는 IT 제품의 핵심 부품이다.
컴퓨터에도 필요하고,
휴대전화에도 필요하고,
각종 전자제품에도 필요하다.
따라서 세계적으로 IT 수요가 증가하면 반도체 수요도 증가한다.
한국은 이미 1980년대부터 반도체에 대규모 투자를 해왔다.
1990년대에도 산업 규모가 크게 성장했다.
KDI에 따르면 한국 제조업에서 반도체 생산 비중은 1991년 3.3%에서 1999년 7.9%까지 상승했고, 수출에서도 반도체의 비중이 크게 확대됐다.
이것은 중요한 변화였다.
과거에는
“한국은 물건을 많이 만드는 나라”
였다면,
점점
“첨단 부품과 전자제품을 만드는 나라”
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12. IT 산업은 한국의 기존 제조업과 결합했다
한국 IT 산업의 특징을 이해하려면 벤처기업만 봐서는 안 된다.
한국에는 이미
대기업,
공장,
전자산업,
반도체,
통신망,
수출 경험,
제조업 인프라가 있었다.
여기에 인터넷과 정보통신 기술이 결합했다.
그래서 한국의 IT 산업은
순수한 인터넷 경제
와
기존 제조업
이 결합하는 형태로 성장했다.
예를 들어 휴대전화 산업을 생각해보자.
휴대전화에는 반도체가 필요하다.
디스플레이가 필요하다.
배터리가 필요하다.
부품이 필요하다.
통신망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를 세계시장에 판매할 유통망도 필요하다.
즉,
IT 산업이 성장한다고 해서 제조업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존 제조업의 기술과 생산능력이 새로운 IT 산업의 기반이 되었다.
13. 이것이 한국 경제의 중요한 특징이 된다
한국 경제는 다시 한 번 산업구조를 바꾸고 있었다.
1950년대에는
농업과 원조
가 중요했다.
1960년대에는
섬유·의류 같은 노동집약적 수출산업
이 성장했다.
1970년대에는
철강·조선·석유화학 등 중화학공업
이 확대됐다.
1980년대에는
전자·자동차·반도체
가 성장했다.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에는
반도체·휴대전화·인터넷·IT 서비스
가 새로운 성장의 중심으로 등장했다.
경제가 성장할 때마다 새로운 산업이 기존 산업 위에 추가된 것이다.
한국 경제는 과거의 산업을 완전히 버리고 새로운 산업으로 이동한 것이 아니라,
기존 산업 위에 새로운 기술을 계속 쌓아 올리는 방식
으로 발전해왔다.
14. 그런데 여기에서 새로운 문제가 생긴다
IT 산업의 성장으로 한국 경제는 다시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위험도 생겼다.
첫 번째는 수출 의존도다.
반도체와 전자제품의 세계 수요에 따라 한국 경제의 성과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세계 IT 경기가 좋으면 수출이 증가한다.
하지만 IT 수요가 줄어들면 반도체 가격과 수출이 크게 흔들릴 수 있다.
실제로 KDI는 2001년 당시 반도체 산업의 경기 변화가 국내 생산과 수출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분석했다.
두 번째는 산업 간 격차다.
IT와 첨단 제조업이 빠르게 성장하는 반면,
전통적인 산업이나 일부 중소기업은 같은 속도로 성장하지 못할 수 있다.
세 번째는 기업 간 격차다.
대규모 연구개발과 설비투자를 할 수 있는 기업과 그렇지 못한 기업 사이의 차이가 커질 수 있다.
경제가 성장한다고 해서 모든 기업과 모든 사람이 같은 속도로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15. 중국이라는 새로운 변수가 등장한다
그리고 2000년대 한국 경제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봐야 할 나라가 있다.
중국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중국의 제조업 경쟁력이 빠르게 커지기 시작했다.
중국은 저렴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세계의 생산기지로 성장했고,
외국 기업의 투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KDI의 분석에서도 1990년대부터 2000년까지 중국이 IT 산업의 여러 분야에서 세계시장 점유율을 빠르게 확대했다고 설명한다.
한국에게 이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가졌다.
한편으로 중국은 거대한 시장이었다.
한국 기업이 제품을 판매할 수 있는 새로운 시장이 될 수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중국은 한국과 경쟁하는 제조업 국가가 될 수 있었다.
한국보다 임금이 낮은 중국에서 생산하면 가격 경쟁력이 높아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은 또다시 선택해야 했다.
“중국보다 싸게 만들 것인가, 아니면 중국보다 높은 기술을 가진 제품을 만들 것인가?”
이 질문은 2000년대 한국 경제의 중요한 문제가 된다.
다음 질문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 경제는 크게 변했다.
기업의 부채가 줄어들었고,
금융시장은 개방되었으며,
벤처기업이 등장했고,
인터넷이 빠르게 보급되었다.
그리고 반도체와 휴대전화 같은 IT 제조업이 성장했다.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경쟁자가 등장했다.
중국이다.
한국보다 임금이 낮으면서도 빠르게 기술을 따라오는 거대한 제조업 국가가 등장한 것이다.
이제 한국 경제는 또 다른 질문을 만나게 된다.
“중국이 세계의 공장이 되면 한국은 무엇을 팔아야 할까?”
이 질문을 따라가면 2000년대 이후 한국 경제의 핵심이었던
중국 수출, 한중 무역, 제조업의 해외이전, 반도체·자동차·조선의 경쟁, 한미 FTA와 세계화
가 연결된다.
다음 편에서는
“중국의 부상은 한국 경제를 어떻게 바꾸었을까?”
를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