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말 한국 경제는 큰 충격을 받았다.
환율은 급격하게 상승했고,
기업들은 잇따라 부도를 맞았으며,
금융기관도 흔들렸다.
결국 한국은 국제통화기금(IMF)에 긴급 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외환위기는 단순히 외화를 빌려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한국 경제에는 기업의 높은 부채,
부실 금융기관,
취약한 기업지배구조,
단기 외화차입,
금융감독의 문제 등 여러 구조적 문제가 함께 존재했다.
그래서 위기를 넘기기 위해서는 돈을 빌리는 것뿐 아니라
경제가 작동하는 방식 자체를 바꿔야 했다.
1997년 외환위기는 바로 이 점에서 중요하다.
한국 경제의 역사를
“위기 이전”과 “위기 이후”
로 나누어 볼 수 있을 정도로 큰 전환점이었다.
1. IMF에서 돈을 빌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1997년 12월 한국과 IMF가 체결한 프로그램은 단순한 대출 계약이 아니었다.
한국은 IMF로부터 자금을 지원받는 대신 여러 경제정책과 구조개혁을 추진하기로 했다.
금융기관을 정비하고,
기업의 재무구조를 개선하고,
기업지배구조의 투명성을 높이고,
금융감독을 강화하고,
자본시장을 더 개방하는 등의 조치가 포함됐다.
즉,
“돈을 빌려줄 테니 경제구조도 바꾸자.”
라는 프로그램에 가까웠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IMF가 모든 변화를 처음 만들어낸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에서도 이미 금융자율화와 시장개방이 진행되고 있었다.
다만 외환위기가 발생하면서 그 변화의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2. 가장 먼저 손을 봐야 했던 것은 금융기관이었다
외환위기의 중심에는 금융기관이 있었다.
은행은 기업에 돈을 빌려준다.
기업이 잘되면 은행은 이자를 받고 원금을 돌려받는다.
그런데 기업이 부도나면 은행도 손실을 입는다.
1997년에는 대기업의 부도가 이어졌고 금융기관이 가지고 있던 부실채권도 크게 늘어났다.
따라서 금융기관 자체를 정리하지 않으면 경제 전체의 신용이 회복되기 어려웠다.
결국 정부는 부실 금융기관을 정리하거나 통합하고, 필요한 금융기관에는 자본을 확충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금융감독 체계도 크게 바뀌었다.
당시 IMF 프로그램에는 은행뿐 아니라 종합금융회사, 증권회사, 보험회사 등을 보다 통합적으로 감독하는 체계를 만들고 금융기관의 재무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쉽게 말하면,
“은행이 누구에게 얼마를 빌려줬는지, 그 돈을 제대로 돌려받을 수 있는지 더 엄격하게 보자.”
는 방향으로 바뀐 것이다.
3. 다음은 기업이었다
금융기관만 고쳐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은행이 부실해진 이유 중 하나는 기업이 빌린 돈을 제대로 갚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업도 바뀌어야 했다.
1997년 이전 한국의 대기업들은 높은 부채를 이용해 사업을 빠르게 확장하는 방식에 익숙했다.
기업의 규모가 커지면 은행도 더 많은 돈을 빌려주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이러한 방식은 성장기에는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기업의 수익성이 떨어지면 문제가 커진다.
빚은 그대로인데 수익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외환위기 이후 기업 구조조정에서 중요한 목표 가운데 하나는
부채를 줄이고 기업의 재무구조를 건전하게 만드는 것
이었다.
실제로 1997년 IMF 프로그램에는 기업의 높은 부채비율을 낮추고, 기업집단 내부의 상호지급보증을 줄이며, 은행 중심의 자금조달을 줄이고 자본시장의 역할을 확대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4. 여기에서 ‘재벌개혁’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1997년 이전의 한국 경제에서는 재벌이 여러 산업에 진출하면서 빠르게 성장했다.
삼성,
현대,
LG,
대우 등 대기업집단은 제조업뿐 아니라 건설, 금융, 유통 등 다양한 분야로 사업을 확장했다.
이러한 구조는 대규모 투자를 가능하게 했다는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하면 위험도 그룹 전체로 확산될 수 있었다.
기업집단 내부에서 계열사끼리 자금을 지원하거나 지급을 보증하는 방식이 광범위하게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외환위기 이후에는
기업이 얼마나 큰가
보다
기업이 얼마나 투명하고 건전하게 운영되는가
가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기업 재무제표의 투명성을 높이고,
외부감사를 강화하고,
이사회와 주주의 역할을 확대하고,
계열사 간 상호지급보증을 줄이는 등의 제도가 추진됐다.
기업을 없애는 것이 목적이라기보다는
기업이 빚을 이용해 계속 몸집을 키우는 방식 자체를 바꾸려는 것
이었다.
5. 그런데 구조조정은 기업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기업이 문을 닫으면 그곳에서 일하던 사람도 일자리를 잃는다.
1997년 이후 실제로 실업자가 크게 증가했다.
여기에서 한국 경제의 또 다른 변화가 시작된다.
노동시장이다.
위기 이전 한국의 노동시장은 평생직장에 가까운 고용관계가 상대적으로 강했다.
하지만 기업이 대규모 구조조정을 진행하면서 인력 감축과 고용조정이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IMF 프로그램에서도 노동시장 유연성을 높이고, 동시에 고용보험을 강화해 노동자의 재취업과 이동을 지원하는 방안이 포함됐다.
이후 한국 사회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
이라는 문제가 훨씬 중요해진 것도 이러한 변화와 연결해서 볼 수 있다.
기업 입장에서는 경기 변화에 따라 인력을 조정할 수 있는 유연성이 중요해졌다.
노동자 입장에서는 고용 안정성이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외환위기는 이 두 가지 요구가 충돌하는 경제환경을 만들었다.
6. 그리고 한국 경제에서 외국자본의 존재감이 커졌다
외환위기 이후 또 하나의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한국 경제가 외국자본에 더 많이 열렸다는 것이다.
위기 당시 한국은 외화가 부족했다.
따라서 해외자본을 유치하는 것은 경제를 안정시키고 기업과 금융기관에 필요한 자금을 공급하는 중요한 방법이었다.
IMF 프로그램에도 자본시장 개방을 가속화하고 외국인 투자를 확대하는 방향이 포함됐다.
이것은 한국 경제의 구조를 바꾸었다.
과거에는
정부 → 은행 → 기업
이라는 국내 자금 흐름이 경제에서 매우 중요했다.
하지만 이후에는
해외 투자자 → 한국 금융시장 → 기업
이라는 경로도 훨씬 중요해졌다.
한국 기업의 주식을 외국인이 사고,
한국 기업에 외국자본이 투자하고,
한국 금융시장의 움직임이 국제 금융시장의 영향을 더 직접적으로 받게 된 것이다.
7. 그렇다면 외국자본이 들어오면 무조건 좋은 것일까?
여기에서는 한쪽으로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외국자본은 기업에 필요한 자금을 공급할 수 있다.
외국 기업의 투자는 기술과 경영방식의 이전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한국 기업이 국제적인 기준에 맞춰 경영하도록 압력을 줄 수도 있다.
반대로 외국자본의 비중이 높아지면 국제 금융시장의 움직임이 국내 경제에 미치는 영향도 커질 수 있다.
투자자가 한국 경제의 위험을 크게 판단하면 자금이 빠르게 빠져나갈 수도 있다.
따라서 1997년 이후 한국 경제는
세계경제와 더 깊게 연결되는 동시에 세계경제의 변화에도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제
가 되었다.
이것은 외환위기 이후 한국 경제를 이해하는 중요한 특징이다.
8. 그런데 구조조정은 경제를 바로 회복시키지 못했다
1998년 한국 경제는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
기업의 투자가 줄었고,
소비도 위축됐으며,
실업자가 크게 늘었다.
기업과 금융기관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경제활동 자체가 위축되었기 때문이다.
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제의 일부를 축소해야 했지만, 그 과정에서 경기침체가 더 심해지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것이 구조조정의 어려움이다.
부실기업을 정리해야 한다.
하지만 기업이 문을 닫으면 생산과 고용이 감소한다.
은행의 대출을 엄격하게 해야 한다.
하지만 대출이 지나치게 줄어들면 정상적인 기업까지 자금을 구하기 어려워진다.
따라서 위기 이후 정책의 핵심은
“무엇을 없앨 것인가?”
뿐만 아니라
“무엇을 살려야 하는가?”
가 되었다.
9. 한국 경제는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1998년의 심각한 침체 이후 한국 경제는 빠르게 회복하기 시작했다.
외환보유액이 늘어났고,
금융시장도 안정되기 시작했다.
기업과 금융기관의 구조조정이 진행되었다.
수출도 다시 증가했다.
그리고 새로운 산업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정보통신과 인터넷 산업이었다.
여기에서 중요한 변화가 하나 나타난다.
1997년 이전 한국 경제의 대표적인 성장산업을 생각하면
철강,
조선,
자동차,
석유화학,
전자제품
등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런데 1990년대 말부터는
인터넷, 이동통신, 반도체, IT 서비스
같은 새로운 산업이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한다.
한국 경제의 다음 성장동력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10. 그래서 외환위기는 역설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1997년 위기는 한국 경제에 큰 피해를 남겼다.
기업이 무너졌고,
실업자가 늘었으며,
가계도 큰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동시에 한국 경제의 구조를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금융기관의 부실을 정리하고,
기업의 재무구조를 개선하고,
기업지배구조를 바꾸고,
금융감독 체계를 강화하고,
자본시장을 개방하고,
노동시장 제도를 변화시키는 작업이 동시에 진행됐다.
KDI는 1998년 이후의 구조개혁을 금융·기업·공공·노동 부문의 개혁과 자본시장 개방을 포함하는 이른바 ‘4+1’ 구조개혁으로 설명한다.
즉,
1997년 위기는 단순히 외환보유액을 다시 채우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경제의 운영방식 자체가 바뀌었다.
11. 그렇다면 IMF가 한국 경제를 바꾼 것일까?
이 질문은 조금 조심해서 볼 필요가 있다.
1997년 이전에도 한국에서는 이미 금융자율화와 시장개방이 진행되고 있었다.
따라서 모든 변화를 IMF의 결과라고 설명할 수는 없다.
다만 외환위기가 발생하면서 기존에 천천히 진행되던 변화가 훨씬 빠르게 진행된 것은 분명하다.
한국 정부와 IMF가 합의한 프로그램에는 금융부문 구조조정, 기업지배구조 개선, 자본시장 자유화, 무역 자유화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보다 정확한 표현은 이렇다.
IMF가 한국 경제를 처음부터 새로 만든 것이 아니라, 외환위기가 기존 경제구조의 변화를 매우 빠르게 진행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이해하면 1997년을 훨씬 정확하게 볼 수 있다.
12. 그리고 여기에서 한국 경제의 새로운 모습이 시작된다
1997년 이전의 한국 경제를 단순화하면 이렇다.
정부가 방향을 정하고
↓
은행이 자금을 공급하고
↓
대기업이 대규모 투자를 하고
↓
수출을 통해 성장한다.
물론 실제 경제는 훨씬 복잡했지만, 큰 흐름은 이런 모습이었다.
1997년 이후에는 구조가 달라졌다.
기업의 재무건전성을 더 중요하게 보고
↓
금융기관의 위험관리를 강화하고
↓
자본시장의 역할을 확대하고
↓
외국자본의 참여를 늘리고
↓
기업지배구조와 시장규율을 강화하는 방향
으로 이동했다.
한국 경제는 이전보다 훨씬 시장 중심적이고 세계화된 경제가 되었다.
하지만 그만큼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세계 금융시장의 움직임이 한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커졌고,
기업과 가계의 금융시장 의존도도 높아졌다.
그리고 경제성장의 중심도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다음 질문
1950년대 한국의 성장동력은 원조와 재건이었다.
1960년대에는 노동집약적 수출산업이 성장했다.
1970년대에는 중화학공업이 등장했다.
1980년대에는 전자·자동차·반도체가 중요해졌다.
그리고 1997년 이후에는
IT와 정보통신산업이 새로운 성장의 중심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인터넷이 보급되고,
휴대전화가 빠르게 확산되고,
반도체 산업이 성장하고,
벤처기업이 등장했다.
한국 경제는 또 한 번 모습을 바꾸고 있었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은 어떻게 그렇게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고, 왜 IT 강국이 되었을까?
다음 글에서는 1997년 이후 IT·벤처·인터넷의 등장과 2000년대 한국 경제를 살펴보자.
여기서부터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한국 경제의 모습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