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일본의 지배가 끝났다.
정치적으로는 해방이었다.
그렇다면 경제적으로도 새로운 출발이었을까?
아마 그렇게 간단하게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해방 당시 한반도에는 이미 철도와 항만이 있었고, 공장과 은행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누가 소유하고 있었는지,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앞으로 누가 운영할 것인지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더구나 해방과 동시에 한반도는 38선을 기준으로 나뉘었고, 남쪽에는 미군정이 들어섰다.
결국 해방 직후의 한국 경제는
식민지 경제의 유산을 물려받은 상태에서
새로운 경제체제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
에 놓이게 된다.
1. 일본이 떠났다고 경제가 바로 정상으로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일제강점기 동안 조선의 경제는 일본 제국의 경제권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런데 1945년 일본이 패망하면서 이 연결이 갑자기 끊어졌다.
문제는 그 연결이 단순한 무역관계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생산과 유통, 금융, 기업의 소유구조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일본인이 소유했던 공장과 기업, 토지, 금융기관 등이 한꺼번에 새로운 관리 대상이 되었다.
미군정은 일본인 소유의 재산을 귀속재산으로 처리하기 시작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당시 귀속재산에는 농지뿐 아니라 사업체와 건물 등이 포함되었으며, 추정 가치가 1948년 남한 정부 세출예산의 약 9배에 달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생각해보면 상당히 큰 문제다.
국가의 경제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재산의 주인이 한순간에 사라진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이 생긴다.
그 재산은 누구에게 돌아가야 할까?
2. ‘일본인 소유 재산’의 주인은 누가 되어야 했을까?
해방 직후 일본인이 남긴 재산은 단순히 버려진 건물이 아니었다.
공장도 있었고, 기업도 있었고, 토지도 있었다.
따라서 이것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앞으로의 경제체제를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미군정은 일본인 소유 재산을 접수하고 관리했다.
그리고 이후 이른바 귀속재산 불하가 이루어졌다.
쉽게 말하면,
일본인이 소유했던 공장이나 기업 등을 새로운 한국인 소유자에게 넘기는 과정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과정이 단순한 재산 정리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누가 공장을 차지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한국의 기업구조가 달라질 수 있었다.
실제로 귀속재산 처리 과정은 이후 한국의 민간기업 형성과도 연결되었다.
그런데 이 과정이 처음부터 깔끔하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한국은행의 역사 자료에서도 귀속재산 불하 과정에서 연고자 우선 원칙 등이 여러 문제를 낳았다고 설명한다.
즉,
해방은 경제적 자산을 새롭게 배분할 수 있는 기회였지만,
그 배분 과정 자체가 새로운 경제질서를 만드는 과정이었다.
3. 농촌에서는 또 다른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한국 사회에서 토지는 훨씬 더 중요한 문제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농업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소작농에게 토지는 단순한 재산이 아니라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생산수단이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동안 형성된 지주-소작 관계가 해방과 동시에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해방 직후 중요한 사회적 요구 가운데 하나가
“농지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
였다.
미군정은 귀속농지를 관리하기 위해 신한공사를 만들었고, 이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전후하여 농지 분배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1950년에는 농지개혁법이 제정되었다.
여기서도 중요한 변화가 발생한다.
농민에게 토지가 분배되면서 한국의 농촌 구조가 크게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4. 그런데 농지개혁이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땅을 나눠줬기’ 때문이 아니다
경제사를 공부하다 보면 토지개혁을 단순히
“농민에게 땅을 줬다.”
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경제적으로는 더 큰 의미가 있다.
농민이 자신의 토지를 소유하게 되면,
농민의 생산과 소득 사이의 관계가 달라진다.
예전에는 농사를 지어도 상당 부분을 지주에게 소작료로 지급해야 했다.
하지만 토지를 소유하게 되면 생산한 농산물에서 발생하는 소득을 자신이 직접 확보할 수 있다.
이것은 단순한 재산의 이전이 아니다.
경제적 이해관계의 구조가 바뀌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이후 한국 사회가 어떤 방식으로 산업화할 것인가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5. 그런데 해방 직후에는 경제를 움직일 기반 자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토지 문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생산도 문제였다.
해방과 함께 일본인 기술자와 경영자들이 대거 빠져나갔다.
식민지 경제권이 해체되면서 기존의 생산·유통망도 흔들렸다.
여기에 귀환 인구, 식량 부족, 주택 부족 등이 겹쳤다.
경제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물가도 크게 불안해졌다.
한국은행 자료에 따르면 해방 이후 1940년대 후반에는 통화량과 물가가 매우 빠르게 상승하는 인플레이션이 나타났다.
즉,
해방 = 경제적 자유
였지만,
해방 = 경제적 안정
은 아니었다.
오히려 새로운 경제체제를 만들어야 하는 상당히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6. 그리고 한반도는 둘로 나뉘었다
여기에 결정적인 변화가 하나 더 발생한다.
분단이다.
38선이 그어지면서 남과 북의 경제도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문제는 당시 한반도의 산업구조가 남북으로 상당히 다르게 배치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북쪽에는 수력발전과 광업, 중화학공업 등이 상대적으로 집중되어 있었고,
남쪽은 농업과 경공업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컸다.
따라서 분단은 단순히 정치적인 국경이 생긴 것이 아니었다.
하나의 경제권이 둘로 나뉘는 일이기도 했다.
전력과 원료, 생산시설과 시장이 서로 분리되었다.
이것은 남한 경제가 앞으로 새로운 생산체계와 공급망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7. 그런데 아직 끝이 아니었다
1945년 해방.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은 이미 불안정했던 경제에 또 한 번의 충격을 가했다.
도로와 철도 같은 교통시설이 파괴되었고, 제조업 생산시설도 큰 피해를 입었다.
국사편찬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전쟁으로 제조업 생산시설의 상당 부분이 파괴되었으며, 전후 복구 과정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대규모 원조가 제공되었다.
이제 한국 경제의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식민지 경제가 해체되었다.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그리고 전쟁으로 생산기반까지 파괴되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으로 경제를 다시 움직일 것인가?
8. 그 답 중 하나가 ‘원조’였다
1950년대 한국 경제를 이해할 때 빠지지 않는 단어가 있다.
원조경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외국의 원조가 한국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식량과 생활필수품이 들어왔다.
농업용품과 의료품도 들어왔다.
공업 원료도 공급되었다.
전쟁으로 부족해진 물자를 공급하는 데 원조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재미있는 문제가 생긴다.
원조는 한국 경제를 살리는 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동시에 한국 경제가 어떤 상품을 생산하고 어떤 산업을 발전시키는지에도 영향을 미쳤다.
특히 미국의 원조물자는 밀, 면화 등 농산물과 공업 원료의 형태로 들어왔고, 이를 바탕으로 제분·제당·면방직 같은 소비재 산업이 성장했다.
이른바 ‘삼백산업’이다.
밀가루.
설탕.
면직물.
오늘날에는 너무 평범해 보이는 상품들이지만,
전쟁 직후에는 한국의 산업을 움직이는 중요한 상품이었다.
9. 원조는 공짜였지만, 경제적 영향까지 공짜였던 것은 아니다
여기서 한 가지 구분이 필요하다.
원조를 받았다는 사실과
원조에 의존하는 경제구조가 만들어졌다는 것
은 다른 문제다.
원조는 부족한 물자를 공급해 경제 회복에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국내 생산이 아니라 외부에서 들어오는 물자에 의존하게 되면 국내 산업의 구조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실제로 값싼 미국산 밀과 면화가 들어오면서 일부 농촌 경제가 타격을 받기도 했다.
따라서 원조경제 역시 한쪽으로만 볼 수 없다.
한편으로는 생존과 복구를 가능하게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 경제의 생산구조와 소비구조에 영향을 미쳤다.
10. 여기서 한국 경제사의 중요한 특징 하나가 보인다
앞에서 개항을 이야기할 때도 비슷한 문제가 있었다.
시장이 확대되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같은 조건에 있지는 않았다.
일제강점기에도 산업과 인프라가 확대되었다.
하지만 그 산업의 소유와 통제는 별개의 문제였다.
해방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원조가 들어왔다.
하지만 원조가 어떤 산업을 키우고 어떤 산업에 부담을 주었는지도 함께 살펴봐야 한다.
결국 경제를 볼 때는 단순히
“무엇이 늘어났는가?”
만 볼 것이 아니라,
“무엇에 의존하게 되었는가?”
도 봐야 한다.
이 질문은 이후 한국 경제를 이해할 때 아주 중요해진다.
11. 1950년대는 ‘가난했던 시대’만은 아니었다
1950년대를 생각하면 흔히 전쟁과 가난을 먼저 떠올린다.
그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하지만 경제사를 조금 더 자세히 보면 이 시기는 이후 산업화의 기반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전쟁 피해를 복구했다.
농지개혁을 통해 농촌의 토지 구조가 바뀌었다.
귀속재산이 새로운 민간기업의 소유로 넘어갔다.
원조를 통해 소비재 산업이 성장했다.
금융과 경제제도의 재편도 이루어졌다.
한국은행도 1950년에 설립되었다.
즉,
1950년대는 단순히 ‘산업화 이전의 가난한 시기’가 아니라
한국 경제의 기본적인 경제주체와 제도가 다시 구성되던 시기였다.
한국은행 자료에 따르면 1956년에는 전력·광업·제조업 생산이 전쟁 이전 수준을 넘어섰지만, 높은 물가상승은 여전히 중요한 문제였다.
경제가 완전히 무너진 채 멈춰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복구와 재편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다.
12. 그리고 여기서 다음 질문이 등장한다
1950년대가 끝나갈 무렵 한국 경제에는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원조가 계속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1957년을 정점으로 미국의 대외원조가 감소하면서 한국 경제는 새로운 재원과 성장방식을 찾아야 했다.
이제까지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원조가 경제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한국 스스로 돈을 벌어야 한다.
문제는 어떻게 돈을 벌 것인가였다.
국내 시장만으로 충분할까?
자원이 많지 않은 나라가 무엇을 팔 수 있을까?
공장을 만들 돈은 어디서 마련할까?
그리고 국가가 경제에 얼마나 개입해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 등장한다.
바로 경제개발계획이다.
다음 글에서는
1960년대 한국 경제를 이야기하려면 흔히 이런 문장을 먼저 떠올린다.
“한국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작했고, 수출 중심 산업화를 추진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더 재미있는 질문은 이것이다.
“자본도 부족하고, 자원도 부족하고, 국내 시장도 작은 나라가 왜 ‘수출’을 선택했을까?”
그리고 또 하나.
“정부는 왜 시장에 맡기지 않고 경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했을까?”
다음 글에서는 바로 이 질문을 가지고
1960년대 한국은 어떻게 ‘수출하는 나라’가 되었는가
를 살펴보자.
여기서부터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수출 중심 한국 경제’의 모습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